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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5년 6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5회) 평북 철산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2) - 철산 출신 민족대표 이명룡 - 평북 철산이 배출한 3·1운동 ‘민족대표’ 자수성가한 사업가, 독실한 신앙인 신민회부터 3·1운동, 물산장려운동 적극 참가 해방 후 월남, 순국선열·민족정신 선양사업 전개 글  이정은(월간 『순국』 편집위원,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평안북도 철산군은 순한 토끼 모양 한반도의 서북 쪽 거의 끝에 있으나, 3·1운동 때는 호랑이같이 맹렬 했고, 독립정신으로 가장 뜨거운 곳의 하나였다. 군 내에는 철산(鐵山)·백량(柏梁)·부서(扶西)·서림(西林)· 여한(餘閑)·참(站)의 6면이 있었으며, 독립만세 시위 는 3월 5일 참면의 차련관에서 스타트를 끊었고, 3월 7일 철산 시위에서 정점을 찍었다. 서울에서 출발하 는 경의선 열차는 이곳 참면 차련관에서 쉬고 용천군 을 지나 신의주역에 다다른다. 군청 소재지는 철산면 중부동이었다. 철산 만세시위는 이곳 출신 민족대표 이명룡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출생과 성장, 사업가 이명룡 이명룡은 1873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차련관리, 첫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인 이창엽(李昌葉). 그는 육남매 중 외아 들이었다. 아버지 생전에는 유복하여 7살 때부터 한 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살 때인 1884년 부 친이 사망하자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집안에서 는 서둘러 이웃 신풍리에 사는 김성련과 결혼시켰다. 12살 때였다. 15세에 이웃 동네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야 했다. 5년간 머슴살이를 했다. 20세 때 집에 돌아왔지만, 먹고 살길은 막막했다. 아버지 친구를 만나 의논했다. 그분과 동업으로 장사 를 하기로 했다. 전답과 집을 처분하고 평북 정주군 남서면 하단동으로 이주했다. 주변 농민들의 무명이나 삼베를 헐값에 사들여 이 윤을 붙여 판매했다. 시간이 갈수록 거래처가 늘어, 평북 정주를 비롯해 선천, 구성, 박천에 이르렀다. 사 업이 번창하자 재산가로 소문이 났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에게로 왔다. 이명룡은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도 겸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