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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1 북한에 납치되었다 풀려난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 02 서울에 도착하여 내무부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가한 귀환자들 03 KNA기 납북사건 증거품들 1958.2.16 KNA여객기 납북사건 02 03 1958년 2월 16일 오전 11시 30분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한 대한민항공사(KNA) DC3형 경여객기 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할 무렵 승객을 가장한 납치범들에 의해 납북됐다. 여자 2명을 포함 총 6명인 납 치범들은 KNA기를 평양 순안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납치범들은 비행기가 경기도 평택 상공에 이 르렀을 때 탑승객 중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실신시킨 다음 칼빈총과 엽총을 기내 앞뒤에서 발사하면서 조종사를 협박,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게 했다. 범인들은 간첩 기덕영(奇德永)의 조종을 받 은 황해도 사리원출신 김택선(金澤善)·길선(吉善)형제와 반공청년이던 김순기(金順基)·최관호(崔寬 浩)와 김형(金亨) 등 5명이었으며, 월북동행자로 김애희(金愛姬)·김미숙(金美淑, 본명 信子)이 있었다. 북한은 승무원 4명과 승객 28명, 납치범 6명 등 모두 38명 중 탑승자 26명만을 3월 6일 판문점을 거 쳐 송환했고 기체는 억류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북한으로 귀순했다고 주장했다. 피랍기의 조종사 는 미국인 윌리스 P홉스, 부조종사는 미공군의 맥클레렌 중령이었다. 피랍 후 송환된 탑승자 가운데에 는 국회의원 유봉순과 공군정훈감 김기완 공군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즉각 북한의 만 행을 규탄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하여 승객과 기체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한국측 입장을 지지하는 국제여론에 밀려 같은 해 3월 6일 납북승객을 송환한다고 발표하였 고, 같은 날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회의〉에서 인수절차가 논의되었다. 7명의 월북자를 제외한 승객들은 같은 날 오후 7시 정전위원회 회담장 앞뜰을 지나 귀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 초의 비행기납치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다른 납북사건과 마찬가지로 범행 당사자가 모두 월북해 버린 탓에 구체적·실제적인 사건 전말보다는 단지 정황과 방증조사(傍證調査)에 의거한 추측성 수사 결과만이 제시되었다. 이 사건의 배후조종간첩으로 체포된 기덕영은 1959년 4월 대법원 판결에 의 해 무기징역이 언도되었다. 01 02 03 01.02.03 한국 군,경 합동 수색대에 의해 체포된 김신조 1968.1.21 무장공비 31명 청와대 기습 기도 일명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21일 밤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중무장한 북한군 31명이 남한에 침투했다가 28명이 사살되고 2명이 도주한,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에 빠트린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유일한 생포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일명 ‘김신조 사건’으로 불린다. 김신조는 이튿날인 22일 새벽 3 시경 한미 군·경합동수색대에 생포되었고, 16시간이 지난 당일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를 떼고, 수하간부들을 총살하 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온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김신조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자신에 대해 “27세입니 다. 본적은 함북 청진시 어항동이고, 주소는 청진시 청암3구역 청양동 제3반입니다. 생년월일은 1942 년 6월 2일”이라고 밝혔다. 또, “조선인민군 제 124군부대 소위입니다”라며 소속과 계급을 말했다. 북 한 124부대는 남조선 해방을 위해 선발된 북한의 최정예부대로, 1시간에 산길 12Km를 달릴 수 있었 다고 한다. 실전훈련으로 도(道)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열두 명을 죽이고도 남조선 간첩의 소 행으로 조작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력의 뒷받침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김신조의 증언에 따르면, 원 래 남파조는 5개조 76명으로 구성되었다. 1조는 청와대, 2조는 미 대사관, 3조는 육군본부, 4조는 서 울교도소, 5조는 서빙고의 간첩수용소를 각각 목표로 삼았었다. 그런데 상부의 지시로 실제 남파 특수 부대원은 31명으로 축소 됐다며 (청와대 습격 당시) 남한 군과 경찰의 방비는 허술했다고 한다. 그는 “ 만일 당초 예정대로 5개조가 모두 내려왔다면 서울 시내는 쑥대밭이 됐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124부대원 31명의 침투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8년 1월 13일 북 한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받은 124부대원 31명은 18 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 미군 2사단이 철책선을 담당하던 서부전선 군사지역 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보낸 이들은 19일 밤 8시 30분경 결빙된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낸 31명 부대원은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 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왔으며, 21일 밤 10시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에 이르게 된다. 이와 관련해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별 다른 저지 없이 수도 서울의 한복판까지 침투할 수 있었 는지는,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만큼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는지 가늠케 하는 한편, 우리 군의 경계태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미 2사단이 담당한 서부전선의 철책선 경계 태세는 이들의 침투를 막기에 역부족일 정도로 헛점이 산재해 있었다. 또, 부대 중앙보다는 상대적으로 빈틈이 많은 서로 다른 두 부대의 사이 즉, 미군 2사단과 한국군 25사단이 경계를 이루는 경로를 이용 해 침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 김신조는 “한국군의 방비가 허술하다”고 지 적해 군 당국을 아연질색하게 만들었다. 31명 특수부대원의 뒤를 쫓은 군·경 합동수색대는 마침내 22일 새벽 3시경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 를 생포한다. 이어 이날 밤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대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31일까지 총 28명의 부대원을 사살한다. 그러나 나머지 2명은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군 병력 1만 9,213 명이 동원된 작전은 종료된다. 93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