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page
3월의 전설(113회) • 충남 서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2) 101 운데 세우고, 남주원이 등단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 하였으며, 애국가를 제창한 뒤 송재만의 선창으로 ①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몸 바 쳐 싸우자. ② 우리는 끝까지 행동을 통일하고 생사 를 같이 한다. ③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의 기밀을 누 설하지 않는다는 3개 항의 「선서문」을 낭독하였다고 한다.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정미면 천의장터 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대호지 만세시위대가 7km, 약 20리 거리의 정미면 천의장터로 간 것은 대호지 면이 “대오지(大奧地)”라 불릴 만큼 외진 곳이어서 장 이 서지 않았고 주재소도 없어, 정미면 천의리에 장 이 서고, 일제 순사 주재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 위행진 중에 천의장터와 가까운 송전리, 장정리, 마 중리 3개 동리 주민들이 장정리에서 집결한 뒤 시위 대와 합류하였다. 천의장터 시위 오전 11시경 시위대가 천의장터에 도착하였다. 대 호지 시위대가 천의장터에 이르자 장터에 있던 장꾼 들이 합세하여 군중은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천의장은 4 · 9일 장으로 정미면은 물론 대호지면과 고대면에서도 장을 보러 왔고, 소(牛)시장이 섰으며 한때는 당진이나 고대장보다 더 번화하여 장터에 행 상들이 진을 쳤고, 식당이 줄줄이 있었던 곳이었다. 천의주재소 일본인 순사 우에하라[上原尙定]와 순 사보 이재영 · 유기우가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위축되지 않고 장터를 행진하며 만 세를 외치고, 주재소 부근과 정미면사무소, 맞은편 높은 언덕에서 계속하여 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는 오후 4시까지 평화롭게 계속되어 군중들은 염건피 장 부근에 모여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때 응원 요청을 받은 당진경찰서 소속 니노미야 [二宮]와 다카시마[高島] 순사가 현장에 도착하여 시 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투 석으로 맞섰다. 응원 순사가 권총을 발사했다. 사상 자가 발생하고, 평화롭게 진행되던 시위가 급변하였 다. 시위대는 투석전을 벌이며 도주하는 순사들을 쫓 아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파괴하 고, 우에하라 순사의 검을 빼앗고, 순사와 순사보에 게 발포한 연유를 따지며 구타했다. 일제는 급보를 받고 응원대를 파견하여 21명을 체 포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천의에 거류 하던 일본인 14명을 서산으로 피신시키고, 주재소를 일시 폐쇄했다. 이 시위로 형이 확정되기 전 옥중에서 김도일(金道 一) · 박경옥(朴敬玉) · 이달준(李達俊) 세 명이 고문으로 순국했다. 행동대장 송재만은 징역 5년, 기타 1년 6 월형 2명, 1년형 28명, 8월형 8명으로, 태90도를 받 은 88명을 포함하여 13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